언젠가 부터 TV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고 있다. 다만 이따금씩 “화제작~”이라 불리는 드라마만 보는 수준이다. 요즘(2014년 하반기)의 화제작은 미생이다. 드라마 미생은 원작 만화 “미생”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난 원작 만화 미생을 먼저 본 뒤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다.
미생은 바둑 신동으로 인정받아 국기원의 바둑 연구생으로 입문했다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주인공 장그래가 사부의 도움으로 대기업인 무역상사 원인터내셔널에 인턴으로 입사한 뒤 어렵사리 2년 계약직으로 전환하여 정규직을 꿈꾸다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함께 일했던 오차장(장그래의 소속팀인 영업3팀 팀장)이 퇴사한 뒤 설립한 작은 무역상사에 입사하기까지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드라마에는 없지만 원작 만화에는 하나하나의 작은 에피소드가 끝날 때 마다 응씨배 1회 대회의 결승 마지막 5번 대국을 한수 한수 복기해 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 9단의 대국) 사실 난 만화나 드라마도 재미있지만 이 대국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하지만 대충 볼줄아는 정도…) 게다가 에피소드의 상황과 맞춰 보는 바둑 고수의 대국은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무슨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둑이 미생의 메인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 입장에서 미생은 조금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살아있음에도 아직 살아있지 못한자의 이야기라니….
기업 내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다.
드라마 미생을 다시보기로 보고 있는데 어제는 박대리의 부정과 비리를 장그래가 명석한 통찰력으로 통쾌하게 잡아내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난 그 장면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이 떠올려졌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조직내의 부정과 비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이상의 처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미생에 나오는 박대리의 비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장 흔한(?) 케이스는…
미생의 박과장 처럼 위장 업체를 설립해 두고 직매출을 간접매출처럼 위장하여 위장업체를 중간에 끼워두고 마진을 챙겨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방법….
잘 아는 협력업체를 통한 매출에 대해 이익을 더 챙겨주고 일부를 커미션으로 받아 챙기는 방법…(가장 흔한…)
직접 영업을 잘 하지 않는 부장이나 본부장의 경우 직접 챙기는 경우도 있지만 아래 부하 영업직원이 수주한 사업에 중간 협력업체를 자신의 협력업체로 바꿔치기 하거나 끼워넣는 방법…
등등… 여러 방법을 통해 눈먼돈을 챙겨간다. 공통점은 고객과의 사이에 아무런 역할이 없는 업체가 끼어든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정과 비리는 분명 범죄다. 하지만 모든 범죄에는 나름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기업에서 영업담당자들이 저지르는 이러한 비리는 사회적인 원인과 조직적인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영업직에게는 “영업비” 혹은 “사업비”라는 항목의 비용이 책정되고 집행된다. 하지만 우리 나라와 만연되어 있는 “접대문화”와 “커미션문화(?)”를 감당하기에 영업사원들에게 지원되는 영업비는 턱없이 부족하게 마련이다.
결국 개인의 사비를 알음알음 쓰게되는 경우도 있다 보니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건 부족한 영업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유로 정당화 시키지만 어느 순간 그 규모가 점점 커져 결국엔 사적으로 유용하게 되어 진짜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리는 팀이나 부서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기도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실적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연봉이나 인센티브를 합당하게 지급해도 비리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실적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미생의 박대리 처럼 스스로 그 보상을 챙기려 비리를 저지르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오로지 돈을 위해 비리를 저지른다.
이런 부정과 비리는 우리 사회…우리 기업에 만연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오염되지 않았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오차장의 퇴사 이유
미생의 시작 시 “과장”으로 설정되어 있던 오차장은 중간에 영업3팀에 합류한 박과장의 과거 앞에서 언급한 형태의 비리를 적발해내 내부고발자로 나선다. 그 결과 회사로부터는 포상을 받았고 차장으로 진금했지만 조직 내부에서는 심각한 견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무로 부터 받은 사업을 추진 중 과거 전무의 사업에서 과도한 마진을 중간업체에게 제공한 것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한 상황 파악 중 주인공 장그래의 실수 아닌 실수로 감사부서에 그 사실이 전달되어 내부 감사가 실시된다. 때문에 전무는 보잘것 없는 계열사의 사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이쯤 되면 오차장의 조직내에서의 입지가 상상될 것이다. 오차장은 그러한 상황에서 먼저 퇴사한 모 부장의 독립 제의를 받고 망설이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과거 함께 일하던 몇명의 직장상사들과 합류하여 독립 사업체를 꾸리게 된다.
부정과 비리에 맞서 싸우던 오차장의 퇴사는 어디까지가 사업추진의 “융통성”이고 어디부터가 “비리”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사람을 살아있지 못하게 만드는 인턴과 계약직 제도
주인공 장그래는 고졸 검정고시 출신의 계약직이다. 그냥 고졸도 아닌 고졸 검정고시 출신이다. 우리 사회는 학력 차별..비정규직 차별 등 차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 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난 이러한 차별이 발생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사람에 대한 평가를 너무 손쉽게 하려 하는 못된 습성과 패거리 문화 그리고 자본주의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여튼 우리 사회에는 미생에서 이야기하는 아직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아직 살아있지 못한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이야 말로 지상낙원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지상낙원을 바라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침묵이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들을 양산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미생의 작가가 놓친 것
바둑에서는 두집을 완성하면 그 바둑알 들은 살아있는 완생이 된다. 그리고 완생한 바둑알 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말 그대로 완생인 것이다.하지만 현실세계는 다르다. 현재 완생이라 하여 미생으로 추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만화와 드라마에서도 완생으로 표현되는 정규직에서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그만두는 케이스가 그려져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정규직을 완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이라 해서 “미생(未生)”이 아니라 “완생(完生)”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 다시 완생에서 미생으로 추락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요즘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생으로 추락하면 완생이 되는 것 또한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미생이든 완생이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