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조지워싱턴의 비교는 당치도 않다

건국 전후의 상황

대한민국은 미국의 정치제도인 대통령제를 채택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입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대통령제는 대통령이 있다는 점만 같을 뿐 매우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포스트의 주제인 이승만 대통령과 조지워싱턴 태통령이 주역이 되어 두 나라가 건국될 당시 처했던 두 나라의 상황 또한 너무도 다릅니다.

대한민국은 만 35년의 일제 강점기를 겨우 벗어났고 남과 북으로 나뉠 위기에 처했으며 일제 강점기 전의 조선 왕조는 일제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어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기나 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해 “학교”를 경험이라도 한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채 안될 만큼 교육 수준도 떨어졌고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할 만한 청렴한 지식인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지식인들 조차 당시 전 세계를 둘로 나눌만큼 강력한 두 개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뉘어 단합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만13년의 영국과의 독립전쟁으로 국토는 피폐해져있었고 국민들은 기나 긴 전쟁에 지쳐있었습니다. 게다가 식민지 개척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앞으로의 미국 국민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본 적이 없는 거친 식민지 개척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정부가 싫어 독립을 하고자 하는데 또 다른 정부가 자신들을 통제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 상태였습니다.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서 “건국”을 하는 것이 쉽냐고 묻는 다면 많은 서로 다른 답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가 더 건국의 과정이 쉬웠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경우가 훨씬 어려웠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두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조지워싱턴

밝혀진 바는 없지만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롤모델로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비교하기에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부끄럽지만 수준 이하 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대부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북 분단에 일말의 책임이 있고 건국 후엔 독재 정치를 펼치다 국민에게 쫒겨났으며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로 의심하기도 합니다. 반면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며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이승만과 조지워싱턴의 비교는 당치도 않다

분명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조지워싱턴 대통령의 발끝도 쫓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1. 안전한 미국으로 피신한 독립운동가 vs 독립전쟁의 전장을 누빈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을 독립운동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실 늘 의문부호가 따라다닙니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총 지휘한 곳은 바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 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먼 왕족 출신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한 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무력 독립 투쟁을 추구하는 다른 독립투사들과 달리 종교적(기독교),외교적인 소극적 독립운동을 주장하다 마찰을 빚고 홀연히 미국으로 도피하듯 건너갔죠. 그리곤 815 광복 때까지 단 한번도 상해 임시정부에 협조적이지 않았으며 독단적인 종교적,외교적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상해 임정으로 부터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쫒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헤이그 특사 임명을 거부하는 등 자신에게 피해가 갈만한 일에는 나서지 않는 등 독립운동에 매우 소극적이고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전장을 누비는 무장투쟁과 함께 외교력 또한 발휘하였습니다. 고삐풀린 망아지와 같다고 표현하였지만 그저 본토 영국의 간섭과 과도한 세금 부과가 싫어 독립전쟁을 벌인 지방정부들은 결속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전쟁 내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연전 연패를 하는 와중에도 조지워싱턴은 포기하지 않고 지방정부를 설득하여 결속력을 유지하고 독립전쟁을 계속하여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즉 두 건국 대통령의 가장 큰 차이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주도적이었는가…아니면 주변인이 었는가의 차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긴 했으나(?) 주변인이었고 조지워싱턴은 독립전쟁의 최전선에 서있던 영웅이라는 점이죠.

2. 배신과 통합

두 대통령은 건국 과정과 건국 직후의 정치적 행보에서도 극명하게 갈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부족하기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이미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고 있던 “친일파”에서 찾았고 공산주의 체제의 장점도 채택하겠다는 등 정치적 기반 마련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때문이 이승만은 친일파 숙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 및 해산)

게다가 자신이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정통성을 갖고 있는 상해 임정의 주역인 백범 김구선생의 통일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주장합니다. 이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미국의 지지를 받았고 결국 다른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한 채 이승만을 위한 남한에 반쪽짜리 정부를 세운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우여 곡절 끝에 미국을 등에 업고 무장 독립 투쟁을 주도한 상해 임정의 주요 인사들을 제치고 반쪽짜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아무래도 김구 선생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게 밀리는 인지도로 인한 민족에 대한 배신과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이같은 이면을 제대로 모르는 대다수의 남한 국민들은 이승만의 반쪽자리 정부를 선택하였구요.

게다가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초기 전투 상황을 제대로 국민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마치 2015년의 메르스 사태를 보는 것과 유사한데 그로 인해 많은 수도권의 민초들이 피난을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만 피신한 뒤 한강의 인도교를 예고없이 불시에 폭파하여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내는 반국민적 행태도 보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625 전쟁 초기 북한군에게 하염없이 밀리자 일본으로 망명 준비를 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조봉암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교수형에 처하기도 합니다. 조봉암 선생은 제1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 이승만의 정치적 동지이자 경쟁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대통령 연임을 위해 그를 배신하고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법살인”을 자행하였습니다.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30%의 지지를 받으며 이승만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많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서슴없이 배신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은 모래알 같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스스로 사적인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독립전쟁 승리 후 홀연히 낙향하여 어떠한 공직도 맏지 않았습니다. 이는 군사력을 이용한 정권 획득이 미국의 건국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되죠. 독립군 총사령관의 자리는 전쟁 승리 후 권력을 장악하는데 매우 유리함에도 조지워싱턴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선거인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에도 조지워싱턴은 결코 사적으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력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 독립당시의 13개 주 정부의 다양한 의견을 통합하여 헌법을 제정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13개 주의 통합을 위한 인프라 건설 뿐만 아니라 13개 주는 물론 각 주의 지방까지도 순회하는 기나긴 여행을 하며 미국 국민들과 대화를 하며 통합을 호소하였습니다. (당시는 철도, 도로 등 인프라가 정말 형편없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결단입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독립당시 세계적으로 왕이 없는 즉 군주제가 아닌 나라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조지워싱턴이 “나 왕할래..”하면 당연히 그를 왕으로 추대할 자세가 되어 있었죠. 하지만 그는 선출직 대통령제를 고집하였고 재선까지만 한 뒤 삼선을 스스로 포기하고 대통령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사실 재선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어쩔 수 없이 수 없이 출마함)

어찌 보면 이승만과 조지워싱턴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초대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 이후 행보의 차이는 “정치적 욕망”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느냐 아니면 “국민과 민족을 위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느냐의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독재와 헌신

대통령 취임 이후의 행보는 두 나라의 시대 상황과 이데올로기 상황이 다른 만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살펴보면 어쨌든 대민민국을 건국한 공로와 기업의 이윤을 노동자들에게도 분배하도록 한 건국헌법 18조와 대통령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적 선거의 정착(비록 부정선거가 판치긴 했지만..)과 지방자치의 실현,언론을 탄압하지 않고 활성화 시킨 점, 문맹퇴치에 대한 공적, 농지개혁과 경제개혁 등 무시하지 못할 업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실정은 더욱 많고 무겁습니다.

먼저 친일파 청산의 실패..아니 청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김구,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수 많은 임시정부 수반을 배반한 채 반쪽자리 정부를 수립한 점, 625 전쟁 발발 시 잘못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여 큰 혼란과 인명피해를 야기한 점, 과도하게 기독교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려 한 점, 조봉암 등 매우 많은 독립투사와 민주투사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비열한 방법으로 중상모략하여 살해한 점, 반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여러 지역에서 수 만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수사와 재판없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 점(보도연맹학살사건), 그리고 여러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재선, 삼선을 위한 선거에서 부정 선거(대표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며 독재 정권의 면모를 보여준 점 등 셀수 없을 만큼 많은 부정과 부패와 인명살상의 책임이 있습니다..

결국 419 민주혁명이 일어나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죠. 그렇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역사에서 대한민국을 더럽힌 대통령으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워싱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대통령직을 명예와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미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데에만 사용하였습니다. “왕”이 되길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져버리고(?) 단 두번만 대통령직을 수락하였고 삼선을 시도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오로지 미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외교, 국방, 조세제도, 연방은행 설립 등의 강력한 중앙 정부 수립에만 헌신했습니다.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독재자로 전락하여 국민으로부터 쫒겨나 해외로 망명한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아직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 그저 위대한 초대 대통령을 가진 미국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그리고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왜곡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 중 일부(교학사가 대표적)는 이승만 대통령을 너무 미화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가 마치 이승만 전기 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위 과대 포장을 하고 있죠. 어느 대통령이나 업적과 과오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명 업적 보다는 과오가 많고 그 결과 419 혁명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쫒겨 났습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말기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에 참가 했던 당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실종된지 27일만에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을 기점으로 시민과 학생이 주도한 419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하였고 그로 인해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시위는 잦아들지 않고 당시 이승만이 머물던 경무대를 향해 몰려오자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하였습니다.

만약 군이 이승만의 지시에 따랐다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은 그런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군 입장에서는 “반란”을 각오한 결단이었을 겁니다. 오죽하면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시를 군이 거부했을까요?

그럼에도 교학사 교과서로 대변되기도 하는 뉴라이트와 같은 보수를 자칭한 친일 수구 인사들은 마치 이승만을 구국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의 국부처럼 교과서에 기술하는 역사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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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국회를 향한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어 이 포스트를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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